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헝가리 왕국 (문단 편집) ==== [[러요시 2세]]와 [[모하치 전투]](1516년 ~ 1526년) ==== 울라슬로 2세가 사망한 뒤, 10살된 아들 [[러요시 2세]]가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새 왕으로 등극했다. 어머니 안은 이미 죽었기에, 서포여이 야노시(Szapolyai János), 에스테르곰 대주교 바코치 타마시(Bakócz Tamás), [[궁정백]] 페레니 임레(Perényi Imre), 그리고 재상 서트마리 죄르지(Szathmári György)가 왕을 대신하여 헝가리의 국정을 주도했고, 보헤미아 쪽은 [[호엔촐레른 가문|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게오르크 변경백(Georg von Brandenburg-Ansbach 1484~1543)[* [[호엔촐레른 가문]]의 안스바흐 방계 출신으로 초대 [[프로이센 공국|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프로이센)|알브레히트]]의 둘째 형이다. 동생이 [[독일 기사단국]]을 세속화하여 최초의 [[루터파]] 국가로 만들었듯, 형도 독일 [[종교 개혁]]에 헌신한 인물이었다.]가 담당했다. 러요시 2세는 재위 내내 별다른 실권이 없었고, 섭정들이 왕실의 수입을 낭비하는 바람에 가난에 찌들었다. 특히 에스테르곰 대주교 바코치 타마시가 사망한 후에는 바토리 추기경, 서포여이 추기경, 베르베츠 추기경이 에스테르곰 대주교 직위를 놓고 격렬하게 정쟁을 벌이면서, 국정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중앙 정부가 제 기능을 못하자, 각지의 대귀족들은 정부를 대놓고 무시하고 백성들을 쥐어짜며 부귀영화를 누렸고, 민중은 자신들을 보살피지 않는 나라를 원망했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의 침략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도 군대에 제대로 된 지원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국경지대의 요새들은 방치되었고 병사들의 기강은 문란해졌다. 1520년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로 즉위한 [[쉴레이만 1세]]는 러요시 2세에게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칠 것을 종용했으나 러요시 2세는 이를 무시했고, 오스만 제국의 사신을 처형해 쉴레이만 1세에게 보냈다. 쉴레이만 1세는 이 사건에 분노하여 헝가리 공격을 준비했다. 당시 헝가리의 재정 상태는 파탄 직전이었고 군대는 해체 직전까지 몰려있었다. 국경 수비대는 임금도 받지 못하고 있었고 국경 요새들은 제대로 된 보수 공사를 받지 못한채 폐허가 되가고 있었으나 러요시 2세는 돈이 없다는 이유[* 부왕 울라슬로 2세가 헝가리를 이미 나락으로 보냈고, 본인도 향락에 빠져 살았다.]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교황]]과 손윗처남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빽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헝가리의 약점을 전부 파악한 쉴레이만 1세는 [[베오그라드|벨그라드]] 공략에 나서 10만 대군으로 당시 헝가리 왕국 최남단의 요충지이자 군사 요새였던 벨그라드를 손쉽게 함락시켰다. [[로도스 섬]] 공방전이 마무리 되자 본격적으로 헝가리 침공을 개시한 쉴레이만 1세에 맞서기 위해 친정에 나섰으나 종조부 [[브와디스와프 3세]]처럼 [[바르나 전투|오스만 기병대를 상대로 정면승부를 하겠다]]는 똑같은 실책을 저질러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군은 궤멸당했고 본인은 패주 끝에 도망치다 강에 빠져 익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